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문단 편집) === [[겨울전쟁]], [[계속전쟁]]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Carl_Gustaf_Emil_Mannerheim.jpg|width=100%]]}}} || || 1940년의 만네르헤임 || [[1939년]], [[소련]]과 [[핀란드]]의 국경 협상이 결렬되었고 전쟁이 임박했다. 만네르헤임은 10월 17일 사직서를 취소했고, 다음달인 11월 30일 [[소련군]]은 대대적으로 핀란드를 침공했다. [[겨울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개전 당일 만네르헤임은 장병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 1939년 11월 30일 [[퀴외스티 칼리오|공화국 대통령]]께서 본인을 이 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셨다. 핀란드의 용맹한 병사들이여! 나는 우리의 뿌리깊은 적이 다시금 우리의 강토를 짓밟으려 하는 이 시점에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승리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지휘관에 대한 신뢰이다. 그대들은 나를 알고 나도 그대들을 알며 계급을 막론한 모두가 각자의 의무를 심지어 죽음에 이르러서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안다. 이 전쟁은 우리의 독립전쟁의 연장전이자 그 마지막 장과 다름없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국가를 위해 싸운다. 여기서 만네르헤임의 대러시아관의 편린이 다시 드러난다. 핀란드는 전쟁을 해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사분오열되던 1차대전 말기, 독일 제국이 러시아를 산산조각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다른 소국들과 함께 독립'''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만네르헤임은 자신들이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독립전쟁이란 다름아닌 핀란드 내전을 말한다. 핀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던 스웨덴계 러시아 귀족 만네르헤임에게 핀란드인 정체성을 부여한 것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전쟁"과 자신이 거기에 기여했다는 사실이었다. 만네르헤임은 1천 km가 넘는 국경을 모두 방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소련도 한정된 돌격로만 이용하리라고 판단했다. 핀란드 북부는 도로 사정도 열악하고 극심한 추위 탓에 대규모 부대의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주요 진격로로 예상되는 카리알라 지협을 중심으로 만네르헤임 선(Mannerheim Line)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핀란드 국민들도 전폭적인 협력을 보냈다. 독립한 지 20년밖에 안 된 핀란드 국민들에게 이 전쟁은 조국의 존속이 걸려있는 전쟁이었다. 자원입대자가 줄을 이었고 진지 구축도 자발적으로 나섰다.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던 핀란드계 이민자들도 핀란드에 돌아와 입대 신청서를 냈다. 11월 29일, 전차 3200여 대, 항공기 3800여 기를 앞세운 26개 사단 46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핀란드군의 전력은 33만 명, 전차 33대, 항공기 110여 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종류를 가리지 않고 총을 나누어준 탓에 정규군마저 개인화기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봐도 소련의 압도적 우세였고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쾌속 진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해 유럽과 서부 러시아 지역의 겨울은 이례적으로 추웠고, 이 북극권 한파의 정중앙에는 바로 핀란드가 위치했다. 12월부터 2월까지 만네르헤임은 전차든 차량이든 사람이든 얼어붙어 옴짝달싹 못하는 소련군을 땔감처럼 조각내서 각개격파했다. 핀란드군은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겨울전쟁에서 거의 완벽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핀란드]]와 [[소련]]은 국력의 규모 자체가 달랐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총사령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해임한 후 [[세묜 티모셴코]]를 새 지휘관으로 앉혔다. 티모셴코는 지난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소련군]]의 지휘와 전술을 바로잡았고 1940년 2월부터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병력 90만 명을 더 투입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핀란드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2주 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었고 결국 만네르헤임 방어선이 무너졌다. 비축한 탄환마저 바닥을 드러내자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정부에 소련과 강화를 맺을 것을 요청했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이 조인되면서 겨울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만네르헤임은 군 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반환했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소련에게 땅을 뜯긴 충격으로 중풍을 맞은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은 병을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기로 했다. 대통령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행사인 열병식에서 칼리오는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만네르헤임의 품에 안긴 채 사망했다. 그리고 총리 [[리스토 뤼티]]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 [[파일:external/waralbum.ru/Hitler-Mannergeim.jpg|width=100%]] || ||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왼쪽에 [[중절모]]를 쓴 인물이 리스토 뤼티 || 소련은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심각한 실수를 하나 했다. 핀란드의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는 소련이 굳이 제한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화조약의 내용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핀란드 국민들은 소련에 이를 갈았지만 겨울전쟁에서 핀란드 병력의 절반이 사라졌고, 무엇보다 핀란드가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굳이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핀란드의 전투력을 보고 감명받은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핀란드에 동맹 의사를 타진해 왔다.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고 독일군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에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되고 3일 후, 소련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독일군 폭격기에게 유류를 보급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18개 도시를 공습하며 [[계속전쟁]]이 발발하였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패퇴하는 틈을 타 빼앗겼던 카리알라(카렐리야)를 탈환했고, 더 나아가 겨울전쟁 전에도 소련 땅이었던 동카리알라까지 점령해 거기에 [[군정|군정청]]을 설치했다. 하지만 만네르헤임은 히틀러가 동맹국으로서 요구하는 각종 사항들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거절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때는 6개 사단을 보냈지만, 포위에만 참여하고 공격은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태업을 시켰다. 계속되는 만네르헤임의 태업에 빡돈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의 75세 생일인 1942년 6월 4일 직접 핀란드로 날아왔다. 이 날 만네르헤임은 내각에게 대원수 칭호를 선물로 받았지만 불청객 히틀러의 방문에 기분을 잡쳤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에게 수도 헬싱키나 총사령부 미켈리가 아닌 외딴 숲 속에서 만나자고 했다. 국가 지도부 간의 공식적 만남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의 생일잔치 음식만 나눠먹고 제대로 요구사항도 전달하지 못한 채 돌아가 버렸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와 만네르헤임이 나눈 대화의 일부는 토르 다멘이라는 [[YLE]] 기술자에 의해 일부가 녹음되었다. 이것은 히틀러가 특유의 강력한 연설 어투가 아닌 일상적인 말투로 발언했던 음성이 담긴 유일한 기록이다. 이 녹음본은 히틀러의 경호원들에 의해 폐기되었으나 전후 복원되어 민간에 공개되어 있다. 훗날 영화 [[다운폴|몰락]]에서 히틀러를 맡은 브루노 간츠가 이 영상을 보고 히틀러의 평소 말투를 연습했다고 한다. [[https://youtu.be/qBYLJAToBJM|링크]]] 여기에 관해서 만네르헤임이 히틀러의 혐연 성향을 알고 일부러 [[시가(담배)|시가]]를 두 개비나 피워서 기를 죽였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매우 유명한 일화지만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한 1944년 6월, 만네르헤임은 더 이상 독일의 요구를 피할 수 없으며,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요구하는 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대해 뤼티 대통령은 핀란드 의회의 의결을 통한 정식 조약 체결을 주장했지만, 만네르헤임은 이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고 뤼티 대통령 개인의 이름으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조약은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뤼티 대통령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의 이름으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핀란드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았기에 나중에 독일이 불리해지자 핀란드는 "방위조약은 뤼티 대통령 개인의 약속이었을 뿐이다."라며 조약을 파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